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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 솔제니친에 관해서


알렉산드로 솔젠니친이란 이름이 생소하신분들이 더러 많으실거라 생각합니다.

이분은 러시아의 소설가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여받으신분이며

러시아이름은 :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1918년 12월 11일 ~ 2008년 8월 3일)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의 작가이다. 1918년 북캅카스의 키슬로봇스크(Кисловодск, Kislovodsk)[1]에서 출생했다. 로스토프 대학을 졸업하였고, 그 이후에 통신대에서 문학 관련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후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포병 장교로 자원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 붉은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44년 동프로이센에서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스탈린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내용과 조롱하는 표현이 문제가 되자 체포되어 굴락으로 보내졌다.

굴락에서 일반 죄수들처럼 지내던 중 수학을 잘하는 것이 발견되어 연구원 전용 수용소[2]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수용소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다시 굴락으로 복귀해[3] 석방될 때까지 다시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생활을 바탕으로 그의 역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썼다.

수감 생활이 끝난 후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어 유형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나 다행히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 스탈린주의로 그는 1956년에 사면되었고 이어 노비 미르(Новый мир)지의 알렉산더 투바노스키를 만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에는 소련 관료제를 비판한 <유익한 사업을 위하여>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제1원에서> 같은 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소련문단의 파문을 일으켰다.[4] 당연히 소련작가연맹은 그의 작품을 반소 작품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심지어 굴락에서의 노동을 통한 개화를 주장하는 어용 작품과 솔제니친은 사실 죄수가 아니었다는 흑색선전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호응을 얻은 이후, 솔제니친은 굴락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수용소 당국의 현실, 재소자들의 사연과 증언들을 정리해 소련 수용소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원고가 KGB에 의해 발각되자 남은 원고들을 서방으로 밀반출 시켰고, 이 원고가 1973년에 발표된 <수용소 군도> 제1부였다. 당연히 소련 정부와 소련작가연맹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포기와 공개 전향,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했다.[5]

하지만 솔제니친은 조국을 떠날 수 없다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는 다르게 스웨덴으로 출국,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에 소련에서는 재입국을 거부했고, 그는 미국의 버몬트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냉전을 겪으면서 서방의 눈치보았던 소련에서는 그를 해코지하는 대신 그가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눈감아 주었다.

1974년이후 무국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90년 소련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냉전기가 종결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인 1994년 귀국을 하였는데, 미국 체류중에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를 항하게 비판한 반공단체로부터 미움을 받았었죠

이후 그는 그동안 정리한 수용소 군도를 4부로 출간하였고[7] 필생의 꿈인 러시아 혁명사를 집필하게 되었다.[8]
솔제니친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격변기 당시 옐친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지만 1992년부터 1993년 즈음 러시아 정부에서 급속히 추진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이 실패해버리고, 이에 대항해 일어난 시위를 유혈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옐친에게 실망, 반 옐친파로 돌아섰다. 귀국 후에 러시아 채널1의 TV토크쇼를 진행하고 <아르구멘티 이 팍티(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라는 신문[9]에 글을 기고하면서 옐친을 비판했다. 결국에 정부 비판적인 성향으로 옐친에게 밉보이면서 아예 프로그램 자체가 날라갔으며 이로 인해 1998년에 아예 훈장수여를 거부해버렸다.[10] 그러다가 푸틴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의 물질주의 세태 비판과 전통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회귀를 주장했으며 푸틴을 강력하게 지지했다.[11]

2008년, 그가 사망하자 러시아 언론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심 중 1명이었으며, 조국 러시아를 향한 긴 발걸음이 이제 멈추게 됐다." 라고 애도했다. 2008년 모스크바의 "대공산주의자 거리(Больш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улица)"가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거리(Улица Александра Солженицына)"로 바뀌었다.[12]

솔제니친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대체로 "조국의 어두운 점을 서방에 폭로한 자"라고 미움받지만, 그의 정치적 노선과 행보를 떠나, 적어도 그의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소련 시절의 굴락과 이로 대표되는 죄수들의 현실에 관한 묘사에 대해서는 러시아에서도 인정하는 권위자이다. 무엇보다도 솔제니친 본인이 비록 서방에 망명했을 지라도, 본인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굴락에서 생활하고 목격한 기록을 남겼던 만큼 작가로써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006년 러시아 1 채널에서 그의 작품 중 '제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를 드라마로 제작, 방영한 적이 있다. 솔제니친이 해설 역할로 직접 참여했으며, 예브게니 미로노프 등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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